내가 젠지 스테어(Gen Z Stare)라는 용어를 처음 들은 건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보건 교사로 일하는 그녀는 진짜로 아픈 학생인건지 아닌건지 구별하는 것도 고될 때가 있다고 했다. 특히 멀쩡한 상태인데도 시답잖은 이유를 대가며 약을 달라거나 누워있게 해달라는 아이들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하면 애들이 그녀를 아무 말도 안하고 빠-안히 응시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떼를 쓰거나 호소를 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무표정으로 그냥 빤히. 그러다가 휙 돌아서 가버린댄다.

그녀는 너무 불쾌하고, 이런 아이들이 한 두명이 아니라서 당황해하다가 최근 "젠지 스테어"라는 일종의 사회적 현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는 거였다.
원래 젠지 스테어는 Z세대 직원이 상사나 고객의 말에 미소나 추임새 없이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반응 방식을 일컫는다. 2023년 하반기 TikTok에서 관련 영상의 누적 조회수가 3억 회를 넘어서며 세계적 담론이 됐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를 두고 "Z세대가 직장 내 감정 수행에 공개적으로 저항하는 첫 번째 집단적 몸짓"이라고 평했다(The Guardian, 2023). 하지만 위의 보건교사 사례처럼, 혹은 반대로 가게 점원이 친절하게 말을 거는데도 대답 없이 빤히 응시하는 Z세대 손님들을 보고 "사회성 붕괴의 전조"라는 비판도 쏟아진다.
어느 쪽이 옳은가. 이 논쟁은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느끼지 않는 것을 느끼는 척하는 거짓의 삶을 거부해야하는 건가, 아니면 타인의 기대에 맞춰 어느 정도는 감정을 연기해야 맞는 건가. 감정의 진정성을 탐구한 사르트르와, 덕의 균형을 설파한 아리스토텔레스를 각기 변론석에 세운다.
1. 옹호 측: 억지 미소야말로 거짓이다 — 사르트르의 변론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1943)에서 '나쁜 믿음(mauvaise foi, bad faith)'을 이렇게 정의한다. 타인이 부여한 역할을 마치 자신의 본질인 양 받아들이는 것. 그의 유명한 카페 웨이터 예시에서, 웨이터가 너무 웨이터답게 굴 때 그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기계가 된다. "나는 친절한 직원이어야 한다"는 명제를 의심 없이 수행하는 순간, 자유는 사라진다.
수치로 보면 이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국노동연구원(2022)에 따르면 국내 감정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약 41%에 달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폭언 앞에서도 웃고, 모욕 앞에서도 "감사합니다"를 반복하도록 제도적으로 강요받는다. 감정 연기를 지속하는 노동자는 번아웃 위험이 2.3배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Journal of Occupational Health Psychology, 2021). 웃음도 공짜가 아니다.
사르트르 식으로 보면 젠지 스테어는 나쁜 믿음에 대한 거부다. 느끼지도 않는 감정을 연기하느니 차라리 솔직하게 존재하겠다는 선언, 그것이 진정성(authenticité)의 출발점이다.
1-1. 착취적 감정노동과 사회적 윤활유는 다르다
옹호 측이 반드시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 젠지 스테어는 모든 친절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강요된 감정 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고객이 직원에게 "왜 안 웃어?"라고 따질 때, 그 친절의 요구는 이미 착취다. 보건교사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정당한 거절에 무표정으로 응수하는 학생들은, 어쩌면 "선생님한테 잘 보여야 한다"는 사회적 연기를 내면화하지 않은 세대일 수 있다. Z세대가 감지하는 것은 감정 연기가 강요되는 그 경계선이다.
2. 비판 측: 무례함을 철학으로 포장하지 마라 —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모든 덕(arete)은 두 극단 사이의 중용(mesotes)이라 설명한다. 감정 표현에 이를 적용하면 구도가 선명해진다.
- 과잉: 아첨, 가식적 친절, 강요된 억지 미소
- 결핍: 무반응, 무표정, 사회적 단절
- 중용: 진정성 있는 예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감정 표현
젠지 스테어는 과잉을 거부한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결핍의 극단으로 빠진다. Gallup(2023) 조사에서 Z세대의 54%가 "직장에서 느끼지 않는 감정을 표현하도록 강요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동시에 관리자의 68%는 "Z세대와의 소통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밝혔다. 저항의 감각은 이해하지만, 그 방식이 공동체를 무너뜨린다면 그것은 덕의 실천이 아니다.
2-1. 습관이 인격을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 중용론의 핵심은 덕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ethos)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억지 미소가 나쁜 습관이라면, 무표정 역시 나쁜 습관이다. 사회적 쿠션, 즉 최소한의 예의는 착취가 아니라 공동체 유지를 위한 윤활유다. 이것마저 거부한다면 그냥 같이 살기 힘든 사람이 된다.
시기적으로도 이 세대를 마냥 탓하기 어렵다. 팬데믹으로 모든 대면 활동이 멈췄던 시기, Z세대는 사회성을 학습해야 할 결정적 시간을 집 안에서 모니터만 보며 보냈다. 최소한의 예의, 최소한의 사회적 습관을 체화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세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덕은 결국 실천으로만 길러진다. 이해는 하되 면죄부는 없다.
"나는 가식을 거부한다"는 선언에서 멈출 때, 그것은 덕의 부재를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성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방기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극단이다.
3. 심판: 둘 다 절반만 옳다
사르트르는 옹호 측 손을 들어줄 것이다. 착취적 감정노동은 나쁜 믿음이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은 자유의 실천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진정성은 타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은 지옥이다"는 타인의 시선이 나를 사물처럼 고정하려 한다는 의미이지, 타인을 외면하라는 말이 아니다. 진정성은 자신의 자유를 인식하면서도 관계 속에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중용이 타협이 아님을 강조한다. 실천적 지혜(phronesis)는 상황을 읽고 적절한 반응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폭언하는 고객에게 억지로 미소 짓는 것은 과잉이고, 친절한 인사에 무반응하는 것은 결핍이다. 진짜 중용은 규칙이 아니라 판단력의 문제다.
결론
젠지 스테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질문이다. 나는 지금 진짜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가, 아니면 구조가 요구하는 감정을 연기하고 있는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 젠지 스테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도 그 보건교사와 같은 편이었다. 불쾌했다. 그런데 그 불쾌함의 뿌리를 따라가보니, 불편한 것이 그들의 무표정이 아니라 내가 평생 당연하게 여겨온 감정 연기였다. 기성세대가 젠지 스테어에 느끼는 불쾌감은, 어쩌면 자신이 수십 년간 유지해온 나쁜 믿음을 처음으로 거울로 들여다보게 되는 순간일 수 있다.
그러나 무표정은 선언이지 해법이 아니다. 진정한 저항은 착취적 감정노동과 사회적 윤활유를 구분하는 판단력을 기르는 것, 그리고 그 경계선을 침묵이 아닌 언어로 말하는 데서 시작된다. 사르트르의 진정성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가 동시에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