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콜센터 야간 근무를 한 적 있었다. 어차피 방학 동안만 일하고 그만 둘 거였다. 그래서 근무 강도는 고려하지 않고 높은 페이만을 기대하며 들어갔다. 국내 모 보일러 회사에서 콜센터만을 외주로 돌린 하청업체였다. 회사 위치는 영등포 어딘가. 겨울 방학이었다.
한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난 사람들이 전화하는 곳. 사람들의 태도가 어떨 것 같은가?

나는 세상에 그런 심한 욕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그렇게 심한 욕을, 그렇게 오랜 시간, 그렇게나 높은 목소리로 내지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나중엔 사람들이 단순히 보일러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란 걸 깨달았고, 2달을 넘겨서 일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왜냐, 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으니까.
정주리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는 내가 겪은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며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소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악독한 개인이 아니다. 얼굴을 지우는 시스템이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바로 이 폭력에 이름을 붙였다. 타자의 얼굴을 숫자로 환원하는 것, 그것이 가장 은밀하고 가장 일상적인 살인이라고.
1. 레비나스의 얼굴: 윤리는 존재보다 먼저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의 오랜 전제, 존재론이 철학의 제1과제라는 명제를 정면으로 뒤집는다. 그는 『전체성과 무한』(1961)에서 이렇게 썼다. "얼굴은 내가 살인하지 못하도록 나를 제지하면서 동시에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발하는 동시에, 그 명령이 무시될 수 있을 만큼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다. 이것이 레비나스 윤리학의 핵심이다. 나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일방적이고 무한한 책임을 진다. 상호적이지 않아도, 계약이 없어도.
1-1. 전체성: 타자를 개념으로 포획하는 폭력
레비나스가 말하는 전체성(Totalité)은 타자의 고유한 무한성을 나의 범주와 언어로 환원하는 시도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틀 안에 가두는 것. 헤드셋 너머에서 욕을 퍼붓는 고객들은 나를 본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보일러 회사 직원"이라는 범주였다. 이름도, 표정도, 사정도 없는. 레비나스가 말한 전체성의 폭력이 콜센터 헤드셋 안에서 매일 밤 일어나고 있었다.
2. 콜센터라는 전체성의 감옥: 소희의 얼굴이 지워지는 방식
소희가 투입된 콜센터에서 그녀가 춤을 좋아한다는 사실, 친구를 아낀다는 사실, 억울하면 얼굴이 붉어진다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희는 해지 방어율, 콜 수, 실적 달성률이라는 숫자로 환원된다. 관리자는 소희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실적 그래프만 본다. 레비나스의 언어로 말하면, 아무도 소희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얼굴이 지워진 자리에 숫자가 들어섰다.
2-1. 폭력의 연쇄: 학교, 교육청, 시스템
비극은 콜센터에서 멈추지 않는다. 소희를 파견한 학교는 취업률이라는 전체성 안에 그녀를 가뒀고, 교육청은 학교를 등급이라는 숫자로 환원했다. 오유진 형사가 교육청 장학사를 찾아가 "누구까지 가야 책임을 지냐"고 묻는 장면은, 전체성의 폭력이 얼마나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레비나스는 『존재와 달리, 혹은 존재성을 넘어』(1974)에서 "책임은 나를 부르는 타자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영화에서 소희의 목소리에 응답한 사람은 끝내 아무도 없었다.
3. 불편한 질문: 우리는 소희를 제대로 보고 있는가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다음 소희〉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우리는, 정말 소희의 얼굴을 마주한 것인가. 아니면 "비극적 희생자"라는 또 다른 전체성 안에 소희를 가두고 소비하는 것인가.
레비나스의 윤리를 더 깊이 적용하면 이 반론은 피할 수 없다. 영화는 소희가 춤추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비극을 강화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기능한다. 관객이 소희를 보며 흘리는 눈물이 "가엾은 희생자"를 소비하는 감정적 쾌감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레비나스가 말한 윤리적 응답이 아니다. 또 하나의 전체화일 뿐이다.
진짜 윤리적 응답은 스크린 속 소희를 보고 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곁에 있는 소희들의 얼굴을 실제로 마주하는 것이다.
결론
콜센터를 그만두던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왔다. 감독관에게도, 옆자리 동료에게도. 그냥 조용히 헤드셋을 내려놓고 나왔다. 나는 그때 내가 겪은 것을 말할 언어가 없었다. 단순히 힘들었다는 말로는 부족했고, 부당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됐다. 레비나스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언어를 찾았다. 나는 그곳에서 얼굴을 잃고 있었다.
오유진 형사가 소희의 춤 영상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정점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뒤늦은 응답이지만, 그래도 응답이다. 〈다음 소희〉는 시스템을 고발하는 영화이기 이전에, 우리가 얼마나 쉽게 타인의 얼굴을 지우며 살아가는지를 묻는 영화다. 회사 건물을 걸어내려오던 그때의 나는 지금 이렇게 홀가분하게 글이나 쓰고 있지만, 사라져간 수많은 소희들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