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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복수에 기꺼이 동참하는 우리: '더 글로리'와 융의 그림자

by ethics-lab-1 2026. 4. 7.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자신을 학대하고 방치했던 엄마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킨다. 패륜, 불효.. 설마 뭐 이런 단어가 떠오르는 사람 없겠지? 세상엔 없는 게 나은 부모도 있다는 걸 우린 모두 알고 있으니까. 문동은의 행보는 오히려 응원을 받는다. 시원하고 통쾌하다. 타인의 복수에 기꺼이 동참하게 되는 이 간접적이고 감정적인 경험. 그 짜릿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더 글로리는 허구지만 박연진과 전재준과 동은의 친모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 사실 널렸다.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나뿐일까.


1. 우리는 왜 복수 서사에 열광하는가: 융의 그림자

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의 무의식 안에 '그림자(Shadow)'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림자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충동들, 즉 공격성, 질투, 복수심, 탐욕 같은 것들이 모여있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착해야 한다. 참아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그 말을 들을수록 그림자는 커진다. 억압될수록 더 강해진다.

 

문동은은 우리의 그림자가 스크린 위에서 걸어다니는 존재다. 우리가 현실에서 절대 할 수 없는 것, 해서는 안 된다고 배운 것들을 그녀는 18년의 계획으로 완성한다. 우리가 문동은의 복수에 열광하는 것은 그녀가 옳아서가 아니다. 그녀가 우리 안의 그림자를 대신 꺼내주기 때문이다. 『더 글로리』의 넷플릭스 글로벌 누적 시청 시간은 4억 시간을 넘어섰다. 이 숫자는 단순한 흥행 지표가 아니다. 전 세계인의 그림자가 동시에 반응한 숫자다.

타인의 복수에 기꺼이 동참하는 우리: '더 글로리'와 융의 그림자
출처 pexels

1-1. 대리 만족이 아니라 대리 해방

융의 그림자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그림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림자는 억압된 에너지다. 그것을 무조건 부정하면 에너지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터져나온다. 우리가 문동은의 복수를 보며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단순한 대리 만족이 아니다. 억압된 그림자가 잠시 숨을 쉬는 순간이다. 융은 이것을 그림자의 통합이라고 불렀다. 내 안의 어두운 면을 외면하지 않고 인식하는 것. 그 인식이 오히려 건강한 심리의 출발점이다.


2. 그림자를 억압하면 어떻게 되는가: 착한 사람의 역설

융이 가장 경계한 것은 그림자를 억압하는 '페르소나(Persona)'의 과잉이다. 페르소나는 사회적 가면이다. 착하고, 참을성 있고, 항상 미소 짓는 사람. 그 가면이 두꺼워질수록 그림자는 더 깊은 곳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폭발한다.

 

한국 사회는 특히 이 페르소나를 강요하는 문화가 강하다. 참는 것이 미덕이고, 복수를 꿈꾸는 것은 저급한 감정으로 치부된다. 그 결과 억압된 그림자는 어디로 가는가. 온라인 익명 공간의 폭력성, 묻지마 범죄, 그리고 역설적으로 『더 글로리』 같은 복수 서사의 폭발적 인기로 터져나온다. 억압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증거다.

2-1. 문동은이 건강한 이유

융의 관점에서 문동은은 역설적으로 심리적으로 건강한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는다. 복수심을 부정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18년 동안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어 의지로 전환한다. 감정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 융이 말한 그림자의 통합, 즉 어두운 면을 인식하고 그것과 공존하며 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을 문동은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3. 사적 제재는 정당한가: 니체와 아렌트의 충돌

드라마 밖으로 나오면 질문이 더 날카로워진다. 현실에서 사적 제재는 정당한가. 2022년 국내 학교폭력 피해 응답률은 1.7%였고, 피해 학생 중 가해자가 적절한 처벌을 받았다고 느끼는 비율은 절반에 못 미쳤다(교육부, 2022). 시스템이 실패했을 때, 개인의 복수는 유일한 정의 실현 수단이 되는가.

 

니체는 『도덕의 계보』(1887)에서 르상티망(Ressentiment)을 이렇게 설명한다. 강자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면서 가치를 창조하지만, 약자는 자신을 긍정할 힘이 없어서 타인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그 부정의 감정, 원한과 질투와 복수심이 뒤섞인 상태가 르상티망이다. 르상티망에 빠진 사람은 가해자를 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감옥에 가둔다. 복수심이 삶의 중심이 되는 순간, 그는 가해자에게 종속된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문동은은 다르다. 그녀의 복수는 감정에 끌려다니는 수동적 르상티망이 아니다. 냉정하게 설계된 능동적 의지의 표현이다. 니체라면 문동은을 자신의 운명을 사랑한 자라고 볼 것이다.

 

반면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1958)에서 이렇게 썼다. "복수는 과거에 묶인 채 반응하는 것이고, 용서만이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아렌트에게 복수는 자동적 반응이다. 그것을 실행하는 순간 나는 가해자의 행위에 종속된다. 복수는 과거를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영구화하는 것이다.

3-1. 『더 글로리』가 판타지인 이유

우리가 문동은의 복수에 열광한 것은 그것이 현실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설계된 복수, 무고한 피해 없이 가해자만 정확히 응징되는 복수. 현실의 복수는 그렇지 않다. 오판, 과잉, 연쇄 보복. 아렌트가 복수를 경계한 이유가 여기 있다. 복수에는 자연적인 종결점이 없다. 아렌트가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정의다. 이해는 되지만 솔직히 나는 심정적으로 동의가 안된다. 더 글로리가 결국 판타지인 것이 눈물나게 통탄스럽다. 분명하고 처절한 복수를 원한다고 내 마음은 소리친다.

 


결론

문동은의 엄마가 정신병원에 실려가는 장면에서 나는 시원했다. 그 감정이 부끄럽지 않다. 융의 말대로, 그것은 내 안의 그림자가 잠시 숨을 쉰 순간이었으니까. 억압된 정의감이, 참아왔던 분노가, 스크린 위에서 한 번 제대로 걸어다닌 것이었으니까.

 

아렌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복수보다 정의가 더 고결한 개념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시스템이 실패하고, 가해자가 웃으며 살아가고, 피해자만 평생 상처를 안고 사는 현실 앞에서 아렌트의 용서론은 때로 너무 멀리 있다. 더 글로리가 판타지인 것이 슬픈 이유가 여기 있다.

 

복수 서사에 열광하는 것은 인간이 정의에 목마르다는 증거다. 융이 말했듯,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과 그림자에 지배당하는 것은 다르다. 내 안의 복수심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에너지를 시스템을 바꾸는 목소리로 전환하는 것. 그 정도가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문동은다운, 그러니까 가장 건강한 선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