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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하는게 맞나: 바디프로필, 푸코, 그리고 자발적 수감자들

by ethics-lab-1 2026. 4. 8.

헬스장에 간다. 8개월쯤 됐다. 걷기도 싫고, 달리기는 더더욱 싫고, 웨이트는 토나오게 싫어하던 나로서는 대단한 발전이 맞다. '돈' 주고 운동이란 걸 할 수 있게 됐을 무렵부터 나는 꽤 이런저런 운동샵을 돌아다닌 편이다. 피티도 받아봤고, 요가, 필라테스, 플라잉 요가, 락스피닝, 방송댄스 등등. 웨이트를 한다는 것이 가장 나랑 거리가 먼 일처럼 느껴졌는데, 세상이 좋아진 건지 내가 마음가짐이 달라진 건지, 아무튼 달라졌다.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어플을 켜고 유튜브의 온갖 훈수 영상들을 참고해서 중량을 늘려가고 있다.

이렇게까지 하는게 맞나: 바디프로필, 푸코, 그리고 자발적 수감자들
출처 pexels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많다. 조금 더 건강한 중년, 노년을 보내기 위해. 아직 나는 할 일이 많으니까. 벌써부터 골골대며 근근이 살아갈 순 없으니까. 그리고 다이어트. 운동을 통해 천천히, 정말로 이제 평생 다이어트에 끌려다니는 노예와 같은 생활을 끝내기 위해. 나는 정말로 자유로워지고 싶으니까.

 

하지만 유독 피곤하고 머릿속이 복잡한 날은 운동하다가 잡생각이 많이 든다. 원암 덤벨 로우를 하면서, 근육의 통증을 느끼면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나? 도대체 뭘 위해서?' 본질을 찾는 질문이라기보다는 불평, 하소연에 가깝다는 거 안다. 하지만 넓고 깔끔하게 정리된 헬스장을 둘러보며 허무주의적인 공상에 빠져들어갈 때가 있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는가.

 

바디프로필이란 걸 찍기 위해 체지방량을 극도로 낮추고 몸을 만드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리고 그들이 금방 원래의 몸을 회복하는 것도. 한 장의 사진을 위해 고행에 가까운 운동을 하고 몸을 조각하는 사람들. 영원하지도 않을 신체의 상태를 잠깐이라도 억지로 만들어서 멋진 사진을 남기는 것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의식 같은 건가. 자신의 인생의 '리 즈 시 절'이라는 타임스탬프를 찍기 위함인가.

 

내가 이렇게 길게 빈정대고 있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바디프로필에 부정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중량을 늘려가며 몸을 만들고 있는 나 자신도, 어쩌면 다른 형태의 같은 욕망 안에 있는 건 아닐까. 그 질문이 불편하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 불편함에 이름을 붙였다.


1. 판옵티콘: 보이지 않는 감시탑이 우리 안에 있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1975)에서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감옥 구조 판옵티콘(Panopticon)을 근대 권력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판옵티콘의 핵심은 이것이다. 죄수들은 중앙 감시탑의 간수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항상 감시받고 있다고 가정하고 스스로 행동을 조심한다. 물리적 강제 없이 시선 자체가 권력이 된다. 푸코는 이것을 이렇게 요약했다. "가시성은 함정이다."

 

21세기의 판옵티콘에는 흉악범도 어두운 감시탑도 없다. 대신 우리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고, 감시탑의 자리는 인스타그램이 차지했다. 우리를 감시하는 간수는 특정 개인이 아니다. 좋아요를 누르는 익명의 대중, 알고리즘, 그리고 사회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완벽한 몸'에 대한 기준이다.

1-1. 시선을 내면화하는 순간

푸코의 판옵티콘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내면화에 있다. 간수가 없어도 죄수는 스스로를 감시한다. 헬스장 거울 앞에서 복근의 선명도를 확인하고, 인바디 숫자에 일희일비하고, 오늘 먹은 것을 칼로리로 환산하는 행위.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이미 간수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 간수의 이름은 타인의 시선이 내면화된 자아다.


2. 바디프로필: 자발적 수감자들의 고행

바디프로필 시장은 숫자로 보면 놀랍다. 국내 바디프로필 스튜디오는 2023년 기준 전국 500개를 넘어섰고, 관련 촬영 비용은 평균 50만 원에서 많게는 2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촬영 전 평균 8~12주간의 다이어트와 운동 프로그램을 병행한다. 그리고 촬영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개월 안에 원래 몸으로 돌아간다.

 

한 장의 사진을 위해. 이것이 건강한 자기관리인가, 아니면 푸코가 말한 순종적인 몸(Docile Bodies)의 완성인가. 푸코는 권력이 인간의 신체를 통제하여 순종적인 몸을 만든다고 보았다. 과거의 권력이 군대나 공장에서 신체를 길들였다면, 현대의 권력은 건강과 미(美)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신체를 통제한다. 바디프로필은 이 순종적인 몸의 가장 극적인 형태다. 자발적으로, 돈을 내며, 기꺼이 수감되는 것.

2-1. 그런데 나는 다른가

불편한 질문을 해야 한다. 바디프로필을 비판하는 나는, 중량을 늘려가며 몸을 만들고 있는 나는, 정말로 다른가. 나 역시 헬스장 거울을 본다. 나 역시 몸의 변화를 확인한다. 나 역시 더 나은 몸을 향해 달려간다. 목적지가 바디프로필 사진이 아닐 뿐, 타인의 시선이 내면화된 간수가 나를 움직이고 있는 건 아닐까. 푸코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3. 그렇다면 진짜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푸코의 진단이 불편한 이유는 탈출구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선에서 자유로운 몸이 가능한가. 타인의 기준을 완전히 지운 채 운동하는 것이 가능한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푸코가 말년에 제시한 개념이 하나 있다. 자기 배려(souci de soi), 즉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실천으로서의 몸 관리다. 그것은 SNS에 올리기 위한 몸이 아니라, 내가 이 몸으로 더 오래, 더 잘 살아가기 위한 몸이다. 차이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이다.

3-1. 질문을 바꾸면 달라진다

"오늘 운동을 했는가"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이 운동을 했는가." 원암 덤벨 로우를 하면서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나"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그 질문이 불평으로 끝나지 않고 진짜 질문이 될 때, 비로소 판옵티콘의 간수가 조금 흔들린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결론

아마 내일도 헬스장에 갈 것이다. 중량을 올리고, 루틴을 편집하고, 기구 사용법을 모르겠으면 검색을 하면서. 무릎 보호대를 하면서까지 인터벌 러닝 30분을 할 것이다. 이제 거의 습관이 된 건지 이렇게 운동을 안 하는 날이 뭔가 어색할 지경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바프를 찍는 사람들과 같은 판옵티콘 안에 들어가 있다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을 비판하거나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자격은 없다. 그래도 '굳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같은 근원적인 질문을 어쩌면 이제 지워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타인의 시선을 이미 내면화했고, 그 감시자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다. 그 감시자는 이미 나 자체다. 굳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고? 그건 너 자신이 원하는 일이야! 이 바보야! 그냥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