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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하다: 미추(美醜)의 감각은 어디서 오는가"

by ethics-lab-1 2026. 4. 10.

빨간 피와 노오란 고름이 함께 흘러내리는 화농성 여드름이 온 얼굴을 뒤덮었다. 말 그대로 이마부터 턱까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자면 베개에 닿은 볼이 아파서 똑바로 누워 자야 했다. 증상과 원인과 치료 등의 모든 생리학적인, 의학적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고등학교 2학년, 18살이었다.

 

나는 그때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추하다.

 

스스로의 얼굴을 보며 추하다고 생각하는 사춘기 여성이 어찌 나 하나였겠나. 하지만 이미 초등학생 시기부터 시작된 외모 집착이 악성 여드름이라는 재앙을 만나 극도의 스트레스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추함'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혔다. 아름답고 싶기도 했지만 '추함'을 피하고 싶은 마음. 지금의 나는 추하다는 감각. 고등학교 과정을 끝내며 드디어 피부과를 찾아가 약을 먹었고, 가끔은 아주 보드라운 피부를 만져보기도 하고, 과거의 추한 나로부터 벗어났다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이제 나는 늙어가고 있고, 그 모습을 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사로잡혀버린 감각이다. 나는 계속해서 늙어갈 것이기 때문에.

 

그래도 존못은 아니야. 같은 비교 행위로는 벗어날 수 있는 거미줄이 아니다. 이런 사람에게 몇 가지 철학적 처방전이 제공되곤 한다. 하나는 제행무상, 영원한 것은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 지금의 추함도 영원하지 않으니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 처방전은 너무 멀리 있다. 거울 앞에서 "외모가 다가 아냐, 집착하지 말자"라고 중얼거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울리는지.

 

그렇다면 추하다는 감각은 애초에 어디서 오는가. 처방전보다 먼저 이 질문을 해야 한다.


1. 수업 시간의 실험: 아름다움의 기원

도가 사상의 미추 분별 거부를 가르치기 위해 썼던 방법이 있다. 누가 봐도 "예쁘다, 아름답다"는 반응을 할 수밖에 없는 외국의 키즈 모델 사진을 보여준다. 이 아이가 아름답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묻는다. 아무도 없다.

 

그다음 질문한다. 무엇이, 어떤 것이 이 아이의 얼굴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드는가. 큰 눈, 오똑한 코, 붉고 도톰한 입술 같은 전형적인 대답부터 보기 좋은 비율, 천진난만한 미소 같은 조금 다른 차원의 답도 나온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내 안의 무엇이 작동하여, 아니 우리 모두 안의 무엇이 작용하여 한 명의 반대도 없이 이 아이를 아름답다고 판단하게 하는가.

 

답은 비교다.

 

그 키즈 모델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눈이 얼마나 커서, 코가 어떤 모양이어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비교라는 행위를 학습하고 내면화하여 능숙하게 그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예 비교를 할 줄 모른다면 어떤 사진을 가져와도 예쁘다든지 아름답다든지 하는 평가를 내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예 아름답다는 말의 뜻 자체를 모를 것이다.

 

아름다움은 비교에서 온다. 그리고 비교의 반대편에는 반드시 추함이 있다.

1-1. 도가가 미추의 분별을 거부한 이유

장자는 『장자』 제물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장과 여희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그들을 보면 깊이 숨고, 새는 높이 날아가 버린다." 아름다움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비교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 판단이다. 도가가 미추의 분별을 거부한 것은 아름다움을 부정해서가 아니다. 비교 자체가 만들어낸 허구임을 꿰뚫어봤기 때문이다.


2. 추하다는 감각은 내 것이 아니다: 보부아르의 진단

비교가 아름다움을 만든다면, 추하다는 감각도 비교가 만든다. 그렇다면 그 비교 능력은 어디서 왔는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1949)에서 이렇게 썼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성의 몸에 대한 감각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다.

 

초등학생 시기부터 시작된 외모 집착. 그 나이의 아이가 스스로 추하다는 기준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 기준은 외부에서 왔다. TV 속 여자 주인공의 얼굴, 예쁘다고 칭찬받는 친구, 못생겼다는 말을 들었던 어느 순간. 보부아르의 언어로 말하면, 나는 타인의 비교 기준을 내면화한 것이다. 추하다는 감각은 내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내 안에 심어놓은 비교의 잣대다.

2-1. 그런데 이 처방전도 불충분하다

보부아르의 진단은 정확하다. 그런데 정확한 진단이 고통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추하다는 느낌이 조작됐다는 것을 알아도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앎과 느낌 사이의 간극. 거울 앞의 18살에게 "그 감각은 사회가 만든 것"이라고 말해줬다면 달라졌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3. 그렇다면 진짜 아름다움은 존재하는가: 플라톤의 이데아

출처 pexles

플라톤은 『향연』에서 아름다움을 계단 구조로 설명한다. 가장 높은 곳에 아름다움의 이데아(Idea)가 있다. 이것은 특정한 무언가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다. 순수하고 완전한 아름다움의 본질. 그 아래 계단에 영혼의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아래에 모든 몸의 아름다움이 있고, 가장 낮은 계단에 특정한 육체, 특정한 얼굴의 아름다움이 있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우리가 거울 앞에서 집착하는 그 얼굴은 아름다움의 사다리에서 가장 낮은 칸에 있는, 이데아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진짜 아름다움은 형태도 없고 색깔도 없는, 순수한 아름다움 자체다.

 

위로가 되는가. 처음엔 됐다. 추한 육체를 가졌어도 아름다운 영혼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은 달콤하다. 하지만 플라톤의 처방전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우리는 영혼으로 살지 않는다. 몸으로 산다. 몸으로 거울을 보고, 몸으로 타인의 시선을 받는다. 육체의 아름다움이 계단의 가장 낮은 칸이라는 말은, 그 칸에서 매일 살아가는 사람에게 너무 높은 곳의 이야기다.

3-1. 셋 다 불충분한 이유

제행무상은 너무 멀고, 보부아르는 감각을 바꾸지 못하고, 플라톤은 너무 높은 곳에 있다. 세 처방전 모두 진단은 정확하다. 그런데 아무도 거울 앞의 18살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는다.


결론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낫다. 외모 컴플렉스도 많이 내려놓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런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늙어가는 얼굴을 볼 때마다 아직도 그 감각이 온다. 추하다.

 

철학은 그 감각을 없애주지 못했다. 다만 철학이 해준 것이 하나 있다면, 그 감각에 이름을 붙이게 해줬다는 것이다. 추하다는 느낌이 비교에서 왔고, 그 비교 능력을 사회가 심어놓았다는 것. 이름을 붙인다고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름 없는 고통보다는 조금 덜 무섭다.

 

도가는 미추의 분별 자체를 거부하라고 한다. 비교를 멈추라고. 나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아마 평생 못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은 안다. 내가 거울 앞에서 추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나의 판단이 아니라 내 안에 깊이 박힌 비교의 잣대가 작동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 잣대를 완전히 뽑아낼 수는 없어도, 그것이 잣대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18살의 나에게 이 철학들을 알려줬다면 달라졌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아마 그때의 나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여드름 안 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