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의 푸념 중에 흔한 것이 "수학 왜 배워요"다. 수학자될 거 아닌데,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하면 됐지, 미적분, 기하, 벡터 이런 거까지 왜 꼭 해야 하느냐고.
이 질문에는 수학자가 꿈이 아닌 사람에게는 중등 수학 교육 과정이 필요가 없다는 가치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나는 이 질문에 정말로 답을 원하는 학생을 만날 때마다 우치다 타츠루가 쓴 『하류지향』이라는 책을 떠올린다.
작년에 한 국립대학에서 강의할 때 그 대학의 신문을 만드는 학생이 인터뷰를 하러 와서 처음 한 질문이 "현대사상은 왜 배워야 하나요?"였다. 이 질문을 한 학생은, 내가 그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하면 그것을 배워도 좋겠지만 내 답에 설득력이 없으면 배우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학술 분야가 배울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결정권은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질문을 통해 밝히고 있다. 나는 이 거만함과 무지에 정말로 감동받았다.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은 어떤 일의 쓸모 있음과 없음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이 바르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쓸모가 있다고 '내'가 결정한 것은 쓸모가 있고, 쓸모가 없다고 '내'가 결정한 것은 쓸모가 없다. 하긴 딱 부러져서 좋긴 하다. 그렇다면 '내'가 쓸모가 있다고 내린 판정이 옳다는 것은 누가 보증해줄 수 있을까. 개인적인 판정이 옳기 위해서는 연대보증인이 필요하다. 그것은 미래의 나다. '나'에게 자기결정권이 있는 것은 내가 한 결정으로 인해 나중에 불리한 사태에 직면한다해도 그 책임은 스스로 감수하겠다고 '내'가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라는 공리주의적 질문을 밑에서 떠받들고 있는 것은 이 '자기결정, 자기책임론'이다. 그리고 이 주장이 헐값에 미래를 팔아치우는 아이들을 대량으로 배출하고 있다. - 『하류지향』, 공부로부터의 도피 중에서
이 책의 내용을 참고하여 나는 답해준다. 수학자 이외에는 중등 수학 교육이 필요없다는 추정은 무슨 근거지? 너의 판단에 의거해 수학 공부를 배제했으나 그 판단이 틀렸을 경우엔 어떡하지? 미래의 너가 책임지면 될 일이긴 해. 하지만 그저 공부하기 싫은 마음에서 나오는 불평일 뿐인 거 아냐? 미래의 네가 그 어떤 분야에서 일한다고 해도, 공부를 해보기도 전에 이미 필요 없다는 판단을 내리는 태도는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거야.

(솔직히 나는 우리나라 중등 수학 교육 과정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은 한다. 영어도. 수능 문제들을 한번 봐라.)
이 고민은 왜 배워야 하나, 인간은 왜 공부를 해야 하나 이런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문에 공리주의적 답변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답했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 공부는 쓸모를 위한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어떤 선(善)을 목표로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선 중에서 최고의 선이 있는데, 그것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다. 흔히 행복으로 번역되지만 더 정확하게는 좋은 삶, 인간으로서 잘 살아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공부는 에우다이모니아를 향한 실천이다. 수학을 배우는 것이 수학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능력은 어떤 삶을 살든 좋은 삶의 기반이 된다. 쓸모는 나중에 따라오는 것이지, 공부의 목적이 아니다.
1-1. 덕은 습관으로 만들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arete)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ethos)으로 형성된다고 말했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어렵고 낯선 것을 끝까지 파고드는 경험이 쌓여야 그 능력이 몸에 밴다. 미적분이 직접적으로 쓸모 있냐 없냐와 무관하게, 미적분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길러지는 사고의 근육이 있다. 그것을 공리주의적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처음부터 질문이 틀린 것이다.
2. 우치다 타츠루의 통찰: 지금의 나는 판단할 자격이 있는가
하류지향의 핵심은 단순하다. 지금의 내가 내리는 판단은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내가 내리는 판단이다. 공부가 필요 없다고 결정하는 그 순간, 나는 이미 충분히 안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모르기 때문에 배우는 것인데,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배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우치다 타츠루는 이것을 자기결정·자기책임론의 함정이라고 부른다. 내가 결정했으니 내가 책임진다는 논리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충분한 정보와 경험 없이 내린 결정의 책임을 미래의 자신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래의 자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2-1. 헐값에 미래를 파는 아이들
한국 교육 현실에서 이것은 더 날카롭게 작동한다. 2024년 기준 국내 초중고 사교육 참여율은 78.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통계청, 2024). 아이러니하게도 이 숫자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효율에 대한 집착을 반영한다. 시험에 나오는 것만, 취업에 필요한 것만. 나머지는 필요 없다. 우치다 타츠루가 경고한 헐값에 미래를 파는 방식이 사교육 시장에서 가장 정교하게 구현되고 있다.
3. 그렇다면 왜 배워야 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우치다 타츠루는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말을 한다. 공부의 이유는 지금 당장의 쓸모가 아니라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을 위한 덕의 실천이라고 말하고, 우치다 타츠루는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내가 내리는 판단을 믿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답변이 학생들에게 설득력이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중등 수학 교육 과정이 지나치게 어렵다고 생각한다. 수능 수학 문제를 한 번 보면 이것이 정말 교양으로서의 수학인지, 아니면 변별을 위한 고문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공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가가 문제일 수 있다.
3-1.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수학 왜 배워요"라는 질문에 담긴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들어야 한다. 그것이 단순한 불평인지, 아니면 교육 과정의 부당함에 대한 저항인지. 전자라면 우치다 타츠루의 논리로 답할 수 있다. 후자라면 그 불만은 정당하다. 그리고 교사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결론
13년 동안 "수학 왜 배워요"라는 질문을 수십 번 들었다. 처음엔 설득하려 했다. 나중엔 질문을 돌려줬다. 지금은 먼저 묻는다. 진짜 묻는 거야, 아니면 그냥 하기 싫은 거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에우다이모니아는 지금 당장 증명할 수 없다. 미적분을 배웠기 때문에 좋은 삶을 살게 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치다 타츠루의 말처럼, 배우기도 전에 필요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는 확실히 좋은 삶에서 멀어지는 방향이다. 공부의 이유는 지금 당장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이 공부의 본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