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의 윤리학

죽음을 선택할 권리: 드라마 '은중과 상연'과 스위스 원정 안락사가 던지는 질문

by ethics-lab-1 2026. 3. 12.

죽음에 관한 뉴스를 직업적 냉정함으로 읽어내려다 멈춘 적이 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한 60대 남성이 스위스행 비행기를 타려다 가족의 신고로 발을 돌렸다는 기사였다. 폐섬유증. 폐 조직이 점점 굳어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불치병. 3~5년 시한부. 그 사람이 선택하려 했던 것이 '도주'가 아니라 '마지막 주권의 행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자기 결정권, 드라마 '은중과 상연'과 스위스 원정 안락사 시도 사건
출처 PEXELS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은중과 상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최근에 이 드라마를 무척 흥미롭게 감상한 나는 이 사건과 드라마 속 상연의 상황을 겹쳐 볼 수 밖에 없었다.

 

이 글은 조력 존엄사를 찬성하거나 반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아직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 질문 - "죽음을 선택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 를 철학과 현실의 언어로 함께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1. 현실의 비극: 왜 그는 스위스로 향했나

폐섬유증과 스위스의 의미

인천공항 사건의 주인공 A씨는 폐섬유증(Pulmonary Fibrosis) 환자였다. 폐 조직이 딱딱하게 굳어가며 서서히 호흡 기능을 잃는 이 질환은, 한번 섬유화된 폐는 되돌릴 수 없으며 진단 후 평균 생존 기간이 3~5년에 불과한 불치병이다. A씨에게 스위스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었다. 고통의 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다.

 

스위스는 전 세계에서 드물게 외국인에게도 의사 조력 자살(Assisted Suicide)을 허용하는 국가다. 취리히에 본부를 둔 비영리단체 디그니타스(Dignitas)는 1998년 설립 이후 현재까지 전 세계 3,000명 이상의 외국인이 이곳에서 생을 마쳤으며, 한국인도 지금까지 10여 명으로 추정된다.

 

A씨의 스위스행은 가족의 신고와 경찰의 설득으로 실패했다.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그의 고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 뿐인 걸까.


2. 드라마 '은중과 상연':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것

줄거리와 사회적 반향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 '은중과 상연'은 불치병을 앓는 상연이 절교한 지 10년 만에 친구 은중을 찾아와 "스위스행에 동행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시작된다. 은중은 갈등 끝에 동행을 결심하고, 상연의 마지막 순간을 옆에서 지켜본다. 드라마는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과 곁을 지키는 자의 내면에 집중한다.

동행자는 처벌받는가

나라면 은중의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우정보다 먼저 "자살방조죄"가 머릿속에 떠올랐을 것 같다. 법조계에 따르면 단순 동행만으로 처벌받을 가능성은 작다. 곽준호 변호사(법무법인 청)는 "조력사망 의사가 이미 확고한 상황에서 단순히 옆을 지킨 것만으로는 처벌이 어렵다"면서도 "자살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거나 비용을 지원할 경우 자살방조죄가 성립될 수 있다"고 밝혔다. 처벌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는, 법의 회색지대다.


3. 철학이 묻는다: 자기결정권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칸트의 자율성과 밀의 해악 원리

'죽음을 선택할 권리'는 철학의 가장 오래된 논쟁 중 하나다.

존 스튜어트 밀(J.S. Mill)은 『자유론(On Liberty)』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에 관한 한,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관한 한, 개인은 주권자다(Over himself, over his own body and mind, the individual is sovereign)." — J.S. Mill, 『자유론』 1장

밀의 해악 원리(Harm Principle) 에 따르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개인의 선택에 국가가 개입할 근거는 없다.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이 원리의 가장 극단적인 적용이다.

 

반면 칸트는 자살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 에 따르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도구화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나 현대 칸트 철학자들은 이 해석에 반론을 제기한다. 오히려 자율성(Autonomy) 을 인간 존엄의 핵심으로 본 칸트의 관점에서,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자율성의 실현일 수 있다고.


4. 찬반의 구조: 권리인가 위험인가

찬성 측 논거

찬성 측은 세 가지 핵심 논거를 제시한다. 첫째, 헌법상 보장된 행복추구권에는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결정할 권리도 포함된다는 자기결정권 논거. 둘째, 극심한 육체적 고통 속의 무의미한 연명 치료는 오히려 고문에 가깝다는 존엄성 논거. 셋째, 한국인의 스위스 원정 조력 사망이 이미 현실화된 만큼 국내 제도화를 통해 투명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현실 논거다.

반대 측 논거

반대 측의 핵심은 '미끄러운 경사면(Slippery Slope)' 우려다. 처음에는 말기 환자로 한정된 기준이 점차 정신질환자, 장애인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벨기에는 2002년 안락사 합법화 이후 2015년부터 미성년자에게도 적용 범위를 넓혔다. 한국의 경우 노인 빈곤율이 OECD 1위(40.4%, 2023)인 상황에서, 경제적 이유로 죽음을 '선택당하는'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는 우려는 결코 가볍지 않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병상 수가 필요 대비 30% 수준에 그치는 현실에서 조력 사망 입법이 선행되는 것은 순서가 잘못됐다는 지적도 있다.


결론: 죽음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야 한다

선택하여 태어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어떻게 마무리할지는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명을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그 마지막 순간까지 삶이 소중하기 때문에.

 

한국 사회는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터부시한다. 그러나 A씨가 공항에서 발을 돌린 이후에도 그의 폐는 계속 굳어가고 있을 것이다. 드라마 속 상연의 선택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확충, 조력 존엄사의 엄격한 요건과 사회적 합의 를 함께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죽음을 양지로 끌어올리는 것, 그것이 삶을 존엄하게 만드는 첫 번째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