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영화가 뭐예요? 라고 물으면 가끔 레이첼 맥아담스가 끝내주게 아름답게 나오는 영화 '어바웃 타임'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의 반응은 긍정적일 때도 있지만 최근엔 부정적인 반응을 더 많이 본 것 같다. '아, 어바웃 타임, 라라랜드 빼고 말하라고 할 걸 그랬어' 같은.
그만큼 사람들 입에 너무 많이 오르내려서 그런지 지겹다는 반응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꿋꿋이 인생 영화로 어바웃타임을 꼽는 사람들을 꽤 좋아(?)한다. 왜냐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단순히 비오는 결혼식 장면이 예뻐서,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가 부러워서가 아니지 않을까 해서다. 영화가 건네고자 하는 행복한 삶의 비밀 공식을 어렴풋이라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주인공. 아버지는 행복한 삶의 비밀 공식을 알려준다. 첫 번째는 일단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두 번째는 거의 똑같이 그 하루를 다시 살아보라고 얘기한다. 처음에는 긴장과 걱정 때문에 놓친 세상의 아름다움을 두 번째에서는 느끼면서 말이다. 물론 어떤 날은 한 번만으로도 충분한 날도 있다.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me)은 표면적으로는 가문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시간 여행 능력을 다룬 판타지 로맨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인간이 마주하는 '시간'의 유한성과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주체성에 대한 거대한 철학적 담론을 담고 있다. 주인공 팀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행복의 비밀 공식은, 서구 철학의 근간 중 하나인 스토아학파(Stoicism)의 정수와 완벽하게 궤를 같이한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외부 자극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결과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는 팀의 두 번째 하루를 통해 감정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체적으로 '일으키는 것'임을 증명한다.
1. 감정의 수동성과 외부 결정론의 함정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기분이 외부 환경에 종속되어 있다고 믿는다. 아침 출근길의 지독한 교통체증, 직장 상사의 부당한 질책, 혹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폭우는 우리의 평온을 깨뜨리는 침입자로 간주된다. 심리학적으로 이를 '외부 통제 소재(External Locus of Control)'라 부르는데, 이는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요인이 외부에 있다고 믿는 태도다.
영화 초반부의 팀은 이러한 결정론적 세계관의 전형을 보여준다. 첫 번째로 겪는 하루에서 그는 주변의 소음과 타인의 무례함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짜증과 불안을 표출한다. 이때의 감정은 외부 사건이 던진 돌에 의해 만들어진 수동적인 파문이다. 스토아 철학이 등장하기 전, 많은 고대 사상가는 인간의 영혼을 외부 자극에 취약한 연약한 그릇으로 보았다. 팀의 첫 번째 하루는 우리가 환경의 노예로 전락했을 때 겪게 되는 실존적 피로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2. 스토아 철학의 핵심: 사물이 아닌 '판단'이 고통을 만든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그의 저서 엔키리디온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사태 자체가 아니라 그 사태에 대한 그들의 의견이다"라고 단언했다. 이는 현대 인지행동치료(CBT)의 모태가 된 사상으로, 사건과 감정 사이에 '판단'이라는 중개자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 판단의 메커니즘: 누군가 나를 모욕했다고 가정해 보자. 대다수는 분노한다. 하지만 스토아주의자들은 묻는다. "그 모욕이 당신의 인격을 실제로 손상시켰는가?" 만약 우리가 그 모욕을 '무지한 자의 실언'이나 '나와 상관없는 소음'으로 판단한다면, 분노라는 감정은 아예 생성되지 않는다.
- 영화적 실천: 아버지가 제안한 두 번째 하루의 핵심은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바라보는 '렌즈'를 교체하는 것이다. 똑같은 지하철 소음이 첫 번째 하루에서는 '귀를 괴롭히는 소음'이었으나, 두 번째 하루에서는 '도시의 역동성을 증명하는 음악'으로 재정의된다. 감정은 사건의 직결된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내린 해석의 산물인 셈이다.
3. 통제의 이분법: 내면의 요새를 구축하는 법
스토아 철학의 또 다른 기둥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다. 날씨, 타인의 평판, 과거의 사건, 육체의 노화 등은 우리의 의지 밖 영역이다. 반면 우리의 판단, 욕구, 회피, 그리고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반응은 오직 우리만이 통제할 수 있다.
팀은 시간 여행 초기에 과거를 고쳐서 '결과'를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과거를 고쳐도 삶의 불확실성과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가 도달한 결론은 외부의 결과를 바꾸려는 헛된 노력을 멈추고, 오직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인 '현재의 마음가짐'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내면의 요새'다. 외부 세계가 아무리 폭풍우처럼 휘몰아쳐도, 판단의 주권을 쥐고 있는 내면은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4. 메멘토 모리와 아모르 파티: 운명을 긍정하는 힘
영화 후반부, 아버지는 암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시간 여행자라도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는 거스를 수 없다. 여기서 스토아적 가치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가 빛을 발한다. 죽음을 늘 염두에 두는 삶은 허무주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매 순간을 밀도 있게 살아가게 하는 촉매가 된다.
팀이 더 이상 시간 여행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의 완성이다. 일어난 모든 일, 심지어 고통과 슬픔까지도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태도다. "과거로 돌아와 두 번째 하루를 사는 것처럼, 이 특별한 보통의 하루를 마지막처럼 즐기며 살려고 노력할 뿐이다"라는 독백은, 운명을 개척의 대상이 아닌 포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현자의 달관을 보여준다.
마침내 시간 여행을 통해 마지막 교훈을 얻었다. 사실 이제 난 더 이상 시간 여행을 하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와 두번째 하루를 사는 것처럼, 이 특별한, 보통의 하루를 마지막처럼 즐기며 살려고 노력할 뿐이다. 인생은 모두가 함께하는 여행이다. 매일매일을 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다.
5. 결론: 감정의 창조자로서 살아가는 기술
결국 감정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일어나는 사고가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일으키는 능동적인 선택이다. 어바웃 타임은 시간 여행이라는 환상적인 설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의 평범함이 가진 위대함을 예찬한다.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능력이 없지만, 팀이 두 번째 하루에서 발휘했던 '해석의 능력'은 이미 소유하고 있다. 오늘 당신이 마주할 무수히 많은 자극 앞에서 당신은 상황의 희생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 상황에 축복의 이름을 붙여 행복을 창조할 것인가. 스토아 철학은 우리에게 그 열쇠가 이미 우리 손안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삶이라는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의 파도를 멈추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