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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미세한 맛 플라수프」가 던지는 경고: 요나스의 책임 윤리 플라스틱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제 코끼리를 죽이지 않아도 당구를 즐길 수 있다"고. 19세기 중반까지 당구공은 코끼리 상아로 만들어졌고, 플라스틱은 역설적으로 동물을 보호하는 '착한 발명'으로 칭송받았다. 그 선의의 발명품이 지금 우리 혈액 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어느 날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 든 그림책 한 권이 이 아이러니를 가장 정직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김지형 작가의 『미세미세한 맛 플라수프』. 아이들을 위한 동화처럼 보이지만, 읽고 나서 한동안 마트에서 플라스틱 포장 식품을 집어 들 때마다 손이 멈칫했다. 이 글은 그 그림책이 촉발한 질문을 독일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의 언어로 풀어가려는 시도다. 기후 위기와 미세 플라스틱 문제에 막연한 죄책감을 느끼지만 .. 2026. 3. 22.
과학 기술의 가치 중립성과 오펜하이머의 형벌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둘러싼 논쟁은 영화적 흥행을 넘어 현대 과학 철학의 가장 아픈 지점을 건드린다. "과학 기술은 가치 중립적인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은 원자폭탄이라는 파괴적인 결과물 앞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펜하이머의 유죄 여부를 가리는 과정은 단순히 한 과학자의 생애를 평가하는 일이 아니라, 인류가 기술을 대하는 태도와 그 뒤에 숨은 윤리적 책임을 성찰하는 과정이다. 1. 가치 중립성이라는 방패: 사실과 가치의 분리과학 기술의 가치 중립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오펜하이머를 '유죄'로 볼 근거가 희박하다고 주장한다. 이 관점의 핵심은 과학적 발견(Fact)과 그 결과물의 활용(Value)을 엄격히 구분하는 데 있다. 핵분열의 원리는 자연의 법칙이며, 이를 발견한 것은 인류 지.. 2026. 3. 21.
MBTI의 T와 F, 그리고 고대 철학의 행복론: 스토아적 아파테이아와 에피쿠로스적 아타락시아 너 혹시 T야?T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냐만은... 이 질문은 알면서도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는 냉정한 사람, 혹은 대화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눈치를 줄 때 하는 말이다. 앞에 욕을 붙이기도 한다. 그만큼 답답하다는 소리. 인간의 성격을 분류하는 도구로 널리 알려진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에서 가장 빈번하게 논쟁의 중심이 되는 지표는 단연 'T(Thinking, 사고형)'와 'F(Feeling, 감정형)'다. 이 두 지표는 단순히 차가움과 따뜻함이라는 성격적 기질을 넘어, 개인이 세상을 바라보고 의사를 결정하는 '철학적 기준'의 차이를 드러낸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현대적 심리 유형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양대 산맥인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가 추구했던.. 2026. 3. 21.
온라인 혐오는 왜 멈추지 않는가: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으로 본 혐오의 구조 2026년 3월 14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96세로 별세했다. '의사소통 합리성'과 '공론장 이론'으로 20세기 민주주의 철학의 토대를 쌓은 거인이었다. 사실 나는 이 부고 소식을 공식 언론 기사가 아니라 온라인 커뮤니티에 업로드된 글 덕분에 알게 되었다. 내가 어느 정도는 커뮤의 헤비 유저임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체로 온건한 성향의 커뮤이기 때문에 추모 댓글이 주를 이뤘지만 불쑥 불쑥 혐오 표현('뭐야, 이 듣보는?', '틀딱이었네' 등)이 끼어들고 있었다. 웃프다는 말마저도 하기 어려운 상황. 하버마스 별세를 알리는 글 위 아래로는 '요즘 엠생사는 XX 근황', '하꼬방송하다 퇴출당한 XX' 같은 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버마스가 평생 경고했던 그 장면.. 2026. 3. 20.
철학자들의 사적인 로맨스 철학은 차가운 이성과 날카로운 논리의 전유물처럼 보이지만, 그 이론을 정립한 철학자들의 삶은 누구보다 뜨겁고 때로는 기괴할 정도로 복잡했다. 그들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유희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적 가치를 증명하거나 혹은 완전히 무너뜨리는 실존적인 실험실이었다. 구글 검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편적인 지식을 넘어, 그들의 사상과 얽힌 기묘한 연애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1. 프리드리히 니체: 소유할 수 없는 뮤즈와의 비극적 춤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며 기존의 도덕을 파괴했지만, 정작 사랑 앞에서는 누구보다 나약하고 서툰 인간이었다. 그의 연애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루 살로메다.루 살로메는 당대 최고의 지성미를 갖춘 여성으로, 니체뿐만 아니라 릴케, 프로이트 등 수많은 천재의 마.. 2026. 3. 20.
우리는 굶주리는 나라를 도와야만 하는가? : 싱어, 노직, 롤스의 관점 비교 오늘날 인류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지만, 지구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절대적 빈곤과 기아로 고통받는 이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굶주리는 나라를 도와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동정심의 문제를 넘어, 현대 윤리학과 정치철학의 핵심 쟁점 중 하나다. 이 글에서는 공리주의적 관점의 피터 싱어, 자유지상주의의 로버트 노직, 그리고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주장한 존 롤스의 이론을 통해 해외 원조에 대한 당위성을 다각도로 고찰하고자 한다.1. 피터 싱어: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과 보편적 의무피터 싱어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해외 원조를 '선택'이 아닌 '의무'로 규정한다. 그는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증진하는 것이 도덕적 선이라고 믿으며, 고통을 느끼는 모든 존재의 이익은 평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한계 .. 2026. 3.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