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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된 얼굴들에게: <다음 소희>와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콜센터 야간 근무를 한 적 있었다. 어차피 방학 동안만 일하고 그만 둘 거였다. 그래서 근무 강도는 고려하지 않고 높은 페이만을 기대하며 들어갔다. 국내 모 보일러 회사에서 콜센터만을 외주로 돌린 하청업체였다. 회사 위치는 영등포 어딘가. 겨울 방학이었다. 한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난 사람들이 전화하는 곳. 사람들의 태도가 어떨 것 같은가? 나는 세상에 그런 심한 욕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그렇게 심한 욕을, 그렇게 오랜 시간, 그렇게나 높은 목소리로 내지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나중엔 사람들이 단순히 보일러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란 걸 깨달았고, 2달을 넘겨서 일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왜냐, 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으니.. 2026. 4. 5.
젠지 스테어: 해방인가 퇴행인가, 사르트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론 내가 젠지 스테어(Gen Z Stare)라는 용어를 처음 들은 건 어느 술자리에서였다. 보건 교사로 일하는 그녀는 진짜로 아픈 학생인건지 아닌건지 구별하는 것도 고될 때가 있다고 했다. 특히 멀쩡한 상태인데도 시답잖은 이유를 대가며 약을 달라거나 누워있게 해달라는 아이들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하면 애들이 그녀를 아무 말도 안하고 빠-안히 응시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떼를 쓰거나 호소를 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무표정으로 그냥 빤히. 그러다가 휙 돌아서 가버린댄다. 그녀는 너무 불쾌하고, 이런 아이들이 한 두명이 아니라서 당황해하다가 최근 "젠지 스테어"라는 일종의 사회적 현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는 거였다. 원래 젠지 스테어는 Z세대 직원이 상사나 고객의 말에 미소나 추임새 없이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 2026. 4. 4.
Ethics Lab 소개 나는 다양한 철학적 갈래 중에서도 '윤리학'에 집중하여 글을 쓴다. 일상에서 떠오르는 다양한 단상들을 철학과 연결하여 생각해보기를 좋아한다. 그것은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일이다. 어쩌면 롤랑 바르트의 책 제목처럼 "나를 쓰고, 나를 읽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용하는 아이디 중에 "Ethicst"라는 게 있다. 사실 문법적으로는 말이 안되지만 Ethics에 내 맘대로 'st'를 붙여 '도덕하는 자, 윤리하는 자'라는 의미의 아이디를 만든 것이다. '도덕함'이라는 용어가 이미 있긴 한데, 한국의 도덕 교과 교육과정에 들어있기도 하고 비판당하기도 하는 개념이다. 어쨌든 나에게 그 학술적 엄밀함은 중요하지 않고 '동사적 분위기'를 살리는 것만이 의의가 있다. 나는 나를 소개할 때, .. 2026. 4. 2.
비주류 철학자 시리즈 5 (완결) : 시몬 베유(Simone Weil, 1909~1943) 이 글은 시몬 베유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기록한 독서 일지에 가깝다. 베유의 문장들은 원전을 바탕으로 한 번역이며, 인용 출처를 각 단락에 밝혔다. 첫날.베유를 처음 펼친 것은 아무 준비 없이였다. 시리즈의 마지막 인물로 그를 선택했을 때, 나는 그저 "좌파이면서 신비주의자, 유대인이면서 가톨릭에 매료된 철학자"라는 소개 문장만 알고 있었다. 그 소개 문장이 이미 이상했다. 좌파이면서 신비주의자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유대인이면서 가톨릭에 매료된다는 것은 어떤 내면의 지형인가. 시몬 베유(Simone Weil, 1909~1943)는 파리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오빠 앙드레 베유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시몬은 오빠의 천재성을 어릴 때부터 옆에서 보며 자랐고.. 2026. 4. 2.
비주류 철학자 시리즈 4: 최한기(崔漢綺, 1803~1879) 심화편 최한기(崔漢綺, 1803~1879): 세 번 읽어야 보이는 사람서론: 나는 최한기를 세 번 오독했다최한기(崔漢綺, 1803~1879)를 처음 접하는 독자는 대개 비슷한 경로를 밟는다. 조선 후기 실학자, 동서양 사상을 융합한 선구자, 근대적 경험주의의 선구자. 이 세 가지 수식어가 그에게 가장 자주 붙는 것들이다. 나는 이 순서대로 최한기를 읽었고, 순서대로 틀렸다. 첫 번째 독해는 그를 정약용의 아류로 만들었고, 두 번째 독해는 그를 동양의 베이컨으로 만들었으며, 세 번째 독해에서야 비로소 그 두 규정 모두 최한기의 사유가 가진 가장 독특한 층위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글은 그 세 번의 오독과 수정의 기록이다. 조선 성리학의 내적 논리와 19세기 서양 경험주의의 구조적 차이에 관심 있는 독자.. 2026. 4. 2.
비주류 철학자 시리즈 4 : 최한기(崔漢綺, 1803~1879) 일반편 나는 한국사를 좋아하고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에 상당한 흥미를 느낀다. 특히 조선 후기의 학자들에게 관심이 크다. 왜냐하면 사상사적으로 그들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견고하던 관료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장시(場市)에서는 돈이 돌았으며, 바다 건너에서 온 낯선 책들이 조선의 서재에 슬그머니 들어오던 시대....! 조선 땅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의 진정한 진리란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민하고 영특한 학자일수록 더 그랬을 것. 그 중 한 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최한기(崔漢綺, 1803~1879): 방 안에서 세계를 읽은 사람서두: 새벽, 명남루에 불이 켜진다새벽 한양. 명남루(明南樓)라는 이름의 서재에 불이 켜진다. 최한기(崔漢綺, .. 2026. 4.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