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의 윤리학

우리는 왜 연프를 볼까: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으로 읽는 연애 리얼리티

by ethics-lab-1 2026. 5. 2.

나와 동거인은 연프 중독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반인 연애 프로그램을 많이 소비한다. 평범한 청춘 남녀가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데이트를 하는 내용은 사실 너무 흔해졌다. 그래서 '모쏠' 설정, '내 새끼의 연애', '합숙맞선', '돌싱X모쏠', '무속인들끼리의 만남' 등 별의별 연프가 다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연프 중독자라면 대한민국은 연프공화국이 맞지 않나.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대화해보면 아예 연프를 보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도대체 모르는 일반인들이 나와서 연애하는 모습이 뭐가 재밌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도 가끔 생각해본다. 연프가 이렇게 넘쳐나고, 시즌이 거듭될수록 출연자만 바뀔 뿐 모든 것이 반복되는데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일까.

 

하트시그널 5가 최근 오픈했다. 선남선녀들이 서울 모처의 아주 예쁜 집에서 모여 서로 간의 탐색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치 드라마처럼 아름답게 셋팅된 이 연애 프로그램에 왜 열광할까. 대리만족? 연애 결핍? 그 설명들이 틀린 건 아니지만 뭔가 부족하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전혀 다른 곳에서 답을 찾는다.

우리는 왜 연프를 볼까: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으로 읽는 연애 리얼리티
출처 pexels


1.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우리는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

르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에서 인간의 욕망이 자발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욕망한다. 이것이 모방 욕망(mimetic desire)이다.

 

지라르는 욕망의 구조를 삼각형으로 설명한다. 주체(나), 중개자(욕망하는 타인), 대상(욕망의 객체). 내가 A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B가 A를 원하니까 나도 A가 욕망스러워 보이는 것이다. 중개자의 욕망이 나의 욕망을 만든다.

 

1-1. 연프에서 작동하는 삼각형

하트시그널에서 출연자 A가 출연자 B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순간, 시청자는 이상한 감정을 경험한다. B가 갑자기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 조금 전까지 별 감흥이 없던 사람이 누군가의 선택을 받는 순간 달라 보인다. 이것이 지라르의 삼각형이 연프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나는 B를 원하는 게 아니라, A가 B를 원하니까 나도 B가 욕망의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2. 선망에서 적대로: 내적 중개와 험담 문화

지라르는 중개자와 주체 사이의 거리에 따라 욕망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중개자가 나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일 때, 예를 들어 역사 속 영웅이나 소설 속 인물일 때, 그것은 외적 중개다. 선망과 동경의 감정이 생긴다.

 

그런데 중개자가 나와 비슷한 세계의 사람일 때, 즉 평범한 일반인 출연자일 때, 그것은 내적 중개가 된다. 이 일반인이 나와 같은 직업군에서 일하는 사람이기만 해도 갑자기 할 말이 많아진다. 이때 욕망은 경쟁심과 적대감으로 변한다.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면 대번 "저 사람 왜 저래"가 시작된다.

 

연프 리얼리티 포맷은 이 전환을 교묘하게 설계한다. 처음엔 출연자들을 예쁜 공간에서 아름답게 보여준다. 선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다 점점 그들의 민낯, 갈등, 실수를 노출한다. 중개자가 내 세계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그 순간 시청자는 출연자를 험담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지라르가 예언한 내적 중개의 작동이다.

 

2-1. 험담이 만드는 공동체

흥미로운 것은 이 흉보기 행위가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저 사람 왜 저래"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암묵적으로 "이게 맞다"는 규범을 선언하고 있다. 연프 커뮤니티에서 출연자 비판이 대화의 접착제가 되는 이유다. 우리는 같은 대상을 욕망하고, 같은 대상을 비판하면서 연대한다.


3. 연프는 왜 멈추지 않는가: 욕망의 전염

지라르의 통찰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모방 욕망이 전염된다는 것이다. A가 B를 원하면 C도 B를 원하게 된다. 그리고 C가 B를 원하면 D도 B를 원하게 된다. 욕망은 자기 증식한다.

 

연프가 시즌을 거듭하며 멈추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출연자만 바뀌어도 욕망의 구조는 동일하다. 시청자는 매번 새로운 중개자를 통해 새로운 욕망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욕망이 채워지면 다음 시즌을 기다린다. 이것은 연애에 대한 결핍이 아니라 모방 욕망의 순환 구조다.

 

3-1.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연프를 통해 진짜 무엇을 원하는가. 지라르의 답은 이렇다. 욕망 자체가 아니라 욕망하는 상태를 원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선망하고, 동일시하고, 비판하는 그 감정의 흐름 자체가 우리를 끌어당긴다. 연프는 그 흐름을 매주 새롭게 공급한다.


결론

하트시그널 5가 시작됐고 나는 오늘도 볼 것이다. 지라르를 알고 난 뒤에도 멈출 수 없다. 어쩌면 그게 더 솔직한 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방 욕망의 구조를 알면서도 그 안에서 기꺼이 욕망한다.

 

연프에 열광하는 것이 연애 결핍 때문이라는 설명은 절반만 맞다. 나머지 절반은 지라르가 말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고, 타인이 비판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 과정에서 잠시 혼자가 아닌 느낌을 받는다. 연프는 욕망의 플랫폼이자 공동체의 플랫폼이다. 무엇이 나를 연프로 끌어당기는가. 바로 타인의 욕망 그 자체를 욕망하는 것, 이것은 꽤 인간적인 욕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