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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윤리학

"담임선생님이 너무 공부공부 하시네요: 루소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좋은 교사란 무엇인가"

by ethics-lab-1 2026. 4. 24.

최근 한 사교육 강사가 사교육을 줄이는 게 어렵지 않다는 발언을 했다. 쉽다고까지 했다. 과고, 외고, 자사고 등 모든 특수한 학교를 없애고 진정한 의미의 고교 평준화를 이루면 고교 입시 관련 사교육은 다 사라질 거라는 의견이었다. 과연 그런가. 우리나라의 학력지상주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실 지금도 지자체 내의 고등학교들은 소위 말하는 "뺑뺑이"로 학교를 가는 평준화 체제가 맞다. 하지만 다양한 형태의 특목고가 존재하기 때문에 고교 입시를 위한 사교육 시장도 대입 시장 못지않은 게 현실이다.

 

중학교 1학년, 첫 지필고사를 앞둔 아이들에게 OMR 카드 작성하는 법, 밀려쓰지 않는 법, 시험 시간에 시간 배분 팁 등을 교육한다. 그다지 공부를 하지 않는 것 같은 아이들도 시험을 앞두고 제법 긴장한다. 과학고나 영재고를 희망하는 아이들은 좀 더 비장한 얼굴로 시험 공부를 하곤 한다.

 

나는 한 때 무엇이 맞는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냉혹한 상대평가가 이루어지는 고등학교에 가게 되면 받게 될 충격을 대비해서 미리미리 중학생들에게 그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내신 시험에서 1등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그랬더니 한 학부모로부터 "담임선생님이 너무 공부공부하신다"는 민원을 받았다.

 

아, 내가 틀린 건가. 공부로, 성적으로 압박을 주기보다 아이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선생님이 되어줬어야 하는건가? 하지만 역시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선생이 되든 아이들은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루소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문에 정반대의 답을 내놓는다.

중1 첫 지필고사를 앞두고 : 마이클 샌델의 '능력주의'와 교실의 딜레마
출처 직접 찍은 교실

1. 루소의 교육론: 아이를 현실로부터 보호하라

장자크 루소는 『에밀』(1762)에서 교육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아이는 태어날 때 본래 선하다. 그것을 망가뜨리는 것은 사회와 제도다. 루소에게 좋은 교육이란 아이를 사회의 인위적인 압박으로부터 최대한 오래 보호하는 것이다. 경쟁, 서열, 평가로부터 아이의 자연스러운 성장을 지켜주는 것.

 

민원을 넣은 학부모가 원한 것이 정확히 이것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 내신 1등급의 잔혹함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 지금은 그냥 아이답게 살게 내버려두라는 것. 루소라면 그 학부모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1-1. 루소의 한계: 현실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루소의 교육론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그것은 이상적인 자연 상태를 전제로 한다. 현실의 교실에는 수능이 있고, 내신이 있고, 특목고 입시가 있다. 아이를 보호막 안에 두는 동안에도 세상은 멈추지 않는다. 루소가 꿈꾼 자연 상태는 한국의 입시 현실 앞에서 사치가 된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론: 덕은 습관으로 만들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arete)을 이렇게 정의한다. "덕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ethos)으로 형성된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되려면 용기 있는 행동을 반복해야 한다. 두려움을 실제로 마주하고 통과하는 경험이 쌓여야 한다.

 

이것을 교육에 적용하면 무엇이 되는가. 아이들이 언젠가 마주칠 경쟁과 평가의 현실을 미리 경험하게 하는 것. 충격을 줄이기 위해 맷집을 길러주는 것.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더 맞다고 생각하고, 그의 철학에 가까운 교육을 했었던 걸지도 모른다.

 

2-1.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 습관이 아이를 갈아넣을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도 위험하다. 덕을 기르기 위한 반복이 자칫 아이를 소진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한국 교육 현실에서 "습관으로 덕을 기른다"는 논리는 쉽게 "더 많이, 더 일찍, 더 강하게" 훈련시키는 것으로 변질된다. 2023년 기준 초중고 사교육 참여율은 78.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통계청, 2023).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 단련인가, 아니면 과잉인가.


3. 교사의 딜레마: 어느 쪽도 완전하지 않다

루소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완전한 답을 주지 못한다. 루소를 따르면 아이를 보호할 수 있지만 현실에 무방비 상태로 내보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면 현실을 준비시킬 수 있지만 아이를 경쟁 기계로 만들 위험이 있다.

 

13년을 교단에 서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이 딜레마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만 교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 선택이 아이를 위한 것임을 잊지 않는 것.

 

3-1. 사교육 강사의 발언이 틀린 이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특목고를 없애면 사교육이 사라진다는 주장. 루소라면 절반쯤 동의할 것이다. 제도가 경쟁을 만든다는 점에서.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라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제도가 바뀌어도 인간의 더 나은 것을 향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외금지가 정부 정책이던 시절에도 불법과외는 성행했다. 학력지상주의는 제도의 산물이 아니라 오랜 습관의 산물이다. 제도를 바꾼다고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결론

나는 한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틀렸나 싶었다. 지금도 확신은 없다. 루소가 옳을 수도 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을 수도 있다. 아니, 철학을 떠나 좋은 교육자의 상이란 어렵고도 가닿기 힘든 불명확한 실체인 것만 같다.

 

다만 이것만은 안다. OMR 카드를 붙잡고 긴장한 14살 아이들 앞에서, 교사가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 성적이 너라는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끝까지 말해주는 것. 낭떠러지가 있다고 알려주되, 거기서 떨어지더라도 다시 올라올 수 있는 방법이 수천가지라는 걸 알려주는 것.

 

그 민원이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마다 생각한다. 그래도 괜찮았다고. 적어도 나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