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혐오의 시대마저 혐오하진 말자. 비주류 초대석에서 김민경 편집자가 한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존경스럽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인간들끼리 서로 싸우고 난리부르스 떨고 이러는게 이번 세기만의 일은 아니다. 인류는 줄창 그래왔다. 그러면서도 발전하고 그러면서도 진화하고 그러면서도 살아남았다.
따라서 이 대혐오의 시대, 못참겠어! 라고 호들갑 떨지 말고 김민경씨처럼 의연한 자세를 가지는게 맞는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가끔 이 세상이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다. 이런 내가 이상한가. 알베르 카뮈라면 아니라고 했을 것 같다.

1. 카뮈의 부조리: 세상은 원래 말이 안 된다
알베르 카뮈는 소설가이자 수필가다. 철학자로 불리는 걸 본인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혐오와 불합리로 가득 찬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의 대답만큼 정확한 것이 없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1942)에서 부조리(absurde)를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은 세상에서 의미와 질서를 원하는데, 세상은 그것을 주지 않는다. 이 간극이 부조리다. 혐오, 폭력, 불합리. 이것들은 세상의 결함이 아니라 세상의 본질이다. 카뮈는 세상이 원래 이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라고 했다.
1-1. 부조리 앞의 세 가지 선택
카뮈는 부조리한 세상 앞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세 가지라고 했다. 첫째는 육체적 자살, 둘째는 철학적 자살, 즉 종교나 이데올로기에 귀의해서 부조리를 외면하는 것, 셋째는 반항이다. 카뮈가 선택한 것은 세 번째다.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살아가기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한 반항이다.
2. 혐오를 혐오하는 것은 패배다
그렇다면 대혐오의 시대에 혐오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카뮈의 논리로 보면 그것은 부조리 감각이다.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느끼는 감각. 역겨움은 감수성의 증거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혐오를 느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혐오에 지배당하는 것. 혐오스러운 세상을 혐오로 대응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논리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혐오가 혐오를 낳고, 그 순환이 멈추지 않는다. 카뮈라면 이것을 부조리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2-1. 시지프스는 왜 행복한가
카뮈의 가장 유명한 문장이 여기서 나온다. "시지프스는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신들의 형벌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올리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시지프스. 그런데 카뮈는 그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왜인가. 바위가 굴러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밀어올리기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 선택 자체가 신들의 형벌을 무력화한다.
대혐오의 시대에 혐오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세상이 혐오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혐오에 동참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한 반항이고, 김민경씨가 말한 "대혐오의 시대마저 혐오하지 말자"의 철학적 근거다.
3. 그런데 나는 왜 참을 수가 없는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 시지프스가 되지 못했다. 세상의 혐오를 보면 역겨움이 먼저 온다. 카뮈의 논리가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런데 카뮈는 이것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과 부조리를 살아내는 것은 다르다. 인식은 한순간에 가능하지만, 살아내는 것은 매일의 선택이다. 시지프스가 바위를 밀어올리는 것은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매번의 반복이다. 혐오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 번 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혐오스러운 장면을 마주할 때마다 다시 선택해야 한다.
3-1. 김민경씨가 존경스러운 이유
그래서 김민경씨의 말이 더 무겁게 들린다. 대혐오의 시대마저 혐오하지 말자는 말은 쉬운 낙관주의가 아니다. 세상이 혐오스럽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럼에도 혐오하지 않기로 매번 선택하는 사람의 말이다. 카뮈가 시지프스를 행복하다고 상상한 것처럼, 그것은 의지의 문제이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결론
국민 10명 중 9명이 보수-진보 이념 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소득계층 간 갈등 77.3%, 세대 간 갈등 71.8%, 젠더 간 갈등 61%(국민통합위원회, 2026). 숫자로 보면 대한민국은 지금 사분오열이다. 남혐 여혐, 노인혐오, 지역혐오, 외국인혐오. 성소수자, 저소득층, 노인층뿐 아니라 내국인-외국인, 남성-여성, 성인-아이, 정규직-비정규직 등 사회를 편 가르는 기준이 되어버린 혐오가 우리 모두를 겨냥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가끔 이 세상이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다. 그것이 부조리 감각이라는 것을 카뮈에게서 배웠다. 그리고 그 감각을 느끼면서도 혐오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 반항이라는 것도. 아직 잘 안 된다. 하지만 김민경씨의 말을 들은 날부터 조금씩 연습 중이다. 시지프스처럼, 매번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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