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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하다: 미추(美醜)의 감각은 어디서 오는가" 빨간 피와 노오란 고름이 함께 흘러내리는 화농성 여드름이 온 얼굴을 뒤덮었다. 말 그대로 이마부터 턱까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자면 베개에 닿은 볼이 아파서 똑바로 누워 자야 했다. 증상과 원인과 치료 등의 모든 생리학적인, 의학적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고등학교 2학년, 18살이었다. 나는 그때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추하다. 스스로의 얼굴을 보며 추하다고 생각하는 사춘기 여성이 어찌 나 하나였겠나. 하지만 이미 초등학생 시기부터 시작된 외모 집착이 악성 여드름이라는 재앙을 만나 극도의 스트레스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추함'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혔다. 아름답고 싶기도 했지만 '추함'을 피하고 싶은 마음. 지금의 나는 추하다는 감각. 고등학교 과정을 끝내며 드디어 피부과를 찾아가 약을.. 2026. 4. 10.
이렇게까지 하는게 맞나: 바디프로필, 푸코, 그리고 자발적 수감자들 헬스장에 간다. 8개월쯤 됐다. 걷기도 싫고, 달리기는 더더욱 싫고, 웨이트는 토나오게 싫어하던 나로서는 대단한 발전이 맞다. '돈' 주고 운동이란 걸 할 수 있게 됐을 무렵부터 나는 꽤 이런저런 운동샵을 돌아다닌 편이다. 피티도 받아봤고, 요가, 필라테스, 플라잉 요가, 락스피닝, 방송댄스 등등. 웨이트를 한다는 것이 가장 나랑 거리가 먼 일처럼 느껴졌는데, 세상이 좋아진 건지 내가 마음가짐이 달라진 건지, 아무튼 달라졌다.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어플을 켜고 유튜브의 온갖 훈수 영상들을 참고해서 중량을 늘려가고 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많다. 조금 더 건강한 중년, 노년을 보내기 위해. 아직 나는 할 일이 많으니까. 벌써부터 골골대며 근근이 살아갈 순 없으니까. 그리고 다이어트. 운동을 통해 천천히.. 2026. 4. 8.
타인의 복수에 기꺼이 동참하는 우리: '더 글로리'와 융의 그림자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자신을 학대하고 방치했던 엄마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킨다. 패륜, 불효.. 설마 뭐 이런 단어가 떠오르는 사람 없겠지? 세상엔 없는 게 나은 부모도 있다는 걸 우린 모두 알고 있으니까. 문동은의 행보는 오히려 응원을 받는다. 시원하고 통쾌하다. 타인의 복수에 기꺼이 동참하게 되는 이 간접적이고 감정적인 경험. 그 짜릿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더 글로리는 허구지만 박연진과 전재준과 동은의 친모 같은 사람들은 세상에 사실 널렸다.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나뿐일까.1. 우리는 왜 복수 서사에 열광하는가: 융의 그림자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의 무의식 안에 '그림자(Shadow)'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림자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충동들, 즉 공격성, 질투, 복수심, 탐욕 .. 2026. 4. 7.
나를 받아들이는 법: 사주 명리학과 스토아철학이 만나는 곳 '사주'는 내게 낯선 단어가 아니다. 오래 준비한 취직 시험을 두번째 떨어졌을 때, 엄마는 내 손을 붙잡고 어느 산 속 깊은 곳에 사시는 '스님(?)'에게 갔다. 이 공부를 계속 해도 괜찮을까요? 아직은 기운이 좋다. 한번 더 준비하라. 엄마, 스님이 원래 이런거 보시는 분들이야? 몰라, 그런 건. 그냥 좋은 말만 들어, 좋은 말만. 스님이 정말 잘 보시는 분이었던 건지, 때려맞추셨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해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취업한 곳에서 사주에 미친(p) 한 동료를 만나게 된다. 그 동료는 클래스101이라는 곳에서 직접 유료 강의를 수강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사주언스'라는 말을 자주 쓰며 자신의 공부를 바탕으로 내 사주팔자를 간략히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나는 사주 8자 .. 2026. 4. 6.
피로해서 못 읽는 『피로사회』: 한병철이 말하는 우리가 지친 진짜 이유 책장에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꽂혀 있다. 사실 얇은 책이고 제목이 주는 강렬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는 걸' 보고 나도 금방 읽겠거니 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내가 지금 많은 사람들이 '샀다'고 했지 '읽었다'고는 안 했다. 책은 난해한 개념들로 가득한 아주 높은 수준의 철학 논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2페이지 정도를 읽고 피로해져서 금방 내려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도 피로한 삶에 대한 통찰을 얻고 싶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 책을 사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이 굉장한 아이러니. 피로해서 볼 수 없는 『피로사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피로한가. 한병철은 그 답이 게으름이나 나약함이 아니라, 우리가 자발적으로 올라탄 시스템 안에 있다고 말한다. 1.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피로의 .. 2026. 4. 6.
숫자가 된 얼굴들에게: <다음 소희>와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콜센터 야간 근무를 한 적 있었다. 어차피 방학 동안만 일하고 그만 둘 거였다. 그래서 근무 강도는 고려하지 않고 높은 페이만을 기대하며 들어갔다. 국내 모 보일러 회사에서 콜센터만을 외주로 돌린 하청업체였다. 회사 위치는 영등포 어딘가. 겨울 방학이었다. 한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난 사람들이 전화하는 곳. 사람들의 태도가 어떨 것 같은가? 나는 세상에 그런 심한 욕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그렇게 심한 욕을, 그렇게 오랜 시간, 그렇게나 높은 목소리로 내지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나중엔 사람들이 단순히 보일러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란 걸 깨달았고, 2달을 넘겨서 일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왜냐, 나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으니.. 2026.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