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이던 어느 해 가을, 뱃속에 아기가 찾아왔다가 9주 만에 떠나갔다. 상실감이 컸다. 그 후 1년 간 자연임신을 시도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고통스러웠다. 원래 아기를 엄청나게 갖고 싶어했던 사람도 아닌데 도대체 왜일까.
그러던 와중에 옆 자리 동료가 허니문 베이비 소식을 알려왔다. 평소 아끼던 사람이었기에 진심을 다해 축하했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름을 붙이기 힘든 어떤 불편한 감정이 스멀스멀 커지기 시작했다. '질투'라 하기엔 너무 피상적이고 '분노'라 하기엔 맞지 않는. 조용하지만 내 일상을 잠식한 이상한 형태의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 동료와 거리를 뒀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인 사람이 있다는 것을. 19세기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그것을 불안(Angst)이라고 불렀다.
1. 불안은 공포가 아니다: 키르케고르의 정의
키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1844)에서 불안을 공포와 명확하게 구분한다. 공포는 대상이 있다. 개가 무섭고, 높은 곳이 무섭다. 원인이 명확하다. 그런데 불안은 다르다. 뭔지 모르게 불편한 것.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데 마음이 무거운 것.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불렀다.
그가 든 예시가 유명하다. 절벽 끝에 선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는 떨어질까봐 두렵다. 그런데 동시에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앞에서 어지럼증을 느낀다. 떨어질까봐 두려운 것은 공포다. 그러나 내가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 즉 선택의 자유 앞에서 느끼는 어지럼증이 불안이다. 불안은 나쁜 것에서 오는 게 아니다. 가능성 자체에서 온다.
1-1. 가능성의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것
임신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그 가능성의 공간 안에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닫혀 있는 것 같기도 한 상태. 키르케고르의 언어로 말하면, 나는 불안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상태에서 동료의 임신 소식은 무엇을 건드렸는가. 그녀의 가능성은 실현되었고, 그러면 내 가능성의 문은 어느 정도인가 가늠하며 초조해졌다. 키르케고르의 언어로 말하면, 그것이 불안이었다.
2. 불안이 관계를 잠식하는 방식
키르케고르는 불안이 인간을 두 가지 방향으로 몰아간다고 말한다. 회피와 직면이다. 불안의 원인으로부터 도망가거나, 아니면 그것을 똑바로 통과하거나.
나는 회피를 선택했다. 동료와 거리를 뒀다. 마주치는 것을 피하며 대화를 줄였다.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잘못이거나 내 잘못이 아님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내 불안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망의 방향이 공교롭게도 그녀를 향하고 있었을 뿐이다.
불안의 가장 잔인한 특성이 여기 있다. 불안은 그 원인을 정확히 겨냥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튀어나온다. 내가 가장 아끼던 동료가 그 표적이 됐다.
2-1. 침묵이 관계에 남기는 것
키르케고르는 관계에서의 침묵을 단순한 소통 부재로 보지 않는다. 침묵은 하나의 선택이다. 말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 그 선택 뒤에는 항상 감추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나의 침묵 뒤에는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그 감정을 인정하는 순간 나 자신이 옹졸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묵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침묵은 관계에 균열을 냈다. 나의 옹졸함, 그것을 매일 새롭게 인정한다.
3. 불안을 통과한다는 것: 사과의 의미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그 동료에게 사과했다. 그때의 내 태도가 옳지 않았다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줬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이렇게 정의했다.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을 배우는 학교다." 불안을 회피하면 그 자리에 머문다. 불안을 통과할 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간다. 사과는 내가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멈춘 순간이었다. 내 감정을 인정하고, 그것이 관계에 미친 영향을 직면한 것.
3-1.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해야 한다. 사과를 했다고 불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난임휴직을 하고, 결국 다른 방식으로 아이를 만났지만, 그 시간 동안의 불안은 지금도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다. 키르케고르도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불안을 통과한 사람은 그것을 다루는 법을 안다. 절벽 끝에 서 있어도 뛰어내리지 않는 법을.
결론
그 동료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다. 그때의 일을 우리 둘 다 크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통과했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다.
이름 붙이기 힘들었던 그 감정. 질투도 분노도 아니었던 것. 그것은 불안이었다. 그녀의 가능성이 실현되는 순간, 내 가능성의 문은 어느 정도인가 가늠하며 초조해졌던 것.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공간 안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소식이 그 공간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을 때 느끼는 어지럼증. 키르케고르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참 뒤에야 찾았다.
불안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조금 덜 무서워진다. 이름 없는 고통보다는 이름 있는 고통이 다루기 쉽다. 그것이 철학이 내게 해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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