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프로야구 팀의 팬이 될 것인가는 혈통에 이미 새겨져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모태신앙처럼 거부할 수 없는 혈연, 지연 뭐 그런 것. 요즘은 자신이 선택해서 응원할 팀을 정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부모님의 고향이나 본인의 출신지, 이런 것들을 빼고 얘기하기는 아무래도 힘들다. 왜일까. 우리는 왜 연고지의 프로팀을 응원하는 걸까.
오늘 야구는 아니지만 아주 어렵게 1부 리그에 올라온 지역 축구단의 홈경기가 있어서 나들이 겸 응원을 다녀왔다. 홈팀의 응원 열기가 뜨거운 것은 당연히 이해한다. 하지만 재밌는 건, 마치 일당백이라도 하겠다는 각오로 응원하는 원정팀이었다. 심지어 원정팀은 상무여서 선수들이 전역하면 흩어져버리는 팀인데도 말이다. 5천여 명의 홈팬 사이에서 소수의 원정팬이 큰북을 가져와 열심히 응원했고, 결국 그 팀이 이겼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연고지 팀을 응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1. 상상의 공동체: 우리는 왜 같은 팀을 응원하는가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1983)에서 국가란 실제로 서로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상 속의 연대라고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 그런데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팀을 응원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연고지 팀을 응원하는 것도 정확히 이 구조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홈팬들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다. 그런데 홈팀의 경기에서 그들은 하나의 목소리로 응원한다. 앤더슨의 언어로 말하면, 지역 연고 팀은 그 지역 공동체를 상상하게 만드는 매개체다. 경기장은 그 상상이 실체화되는 공간이다.
1-1. 연고지 팀이 특별한 이유
단순히 좋아하는 선수가 있어서, 혹은 성적이 좋아서 응원하는 팀과 연고지 팀은 다르다. 연고지 팀의 패배는 단순한 스포츠 결과가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패배처럼 느껴진다. 반대로 승리는 내 일처럼 기쁘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경기에 뛰지 않았고, 선수들을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긴다, 진다고 말한다.
2. 나는 왜 연고지 감정이 없는가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이 지역에 살지만 홈팀에 아무 감정이 없었다. 오늘 경기장을 찾은 것도 팬이어서가 아니라 방과후 축구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실제 경기를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경기가 시작되고도 한동안 나는 관객이었지 팬이 아니었다.
이것이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가 작동하지 않는 사람의 상태다. 공동체를 상상하려면 그 공동체와 연결된 무언가가 필요하다. 출생지, 거주지, 기억, 혹은 가족. 나에게는 홈팀과 연결된 그 무언가가 아직 없었다. 그런데 오늘 경기장에서 뭔가가 조금 달라졌다.
2-1. 아이들이 바꾼 것
아이들이 경기를 보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골이 들어갈 뻔한 순간 손을 꼭 쥐고, 심판 판정에 억울해하고, 원정팀 큰북 소리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봤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홈팀의 골을 바랐다. 아이들 때문에.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는 어쩌면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경험이 쌓이면서.
3. 원정팬의 역설: 카뮈의 부조리와 응원의 의미
그렇다면 오늘의 진짜 수수께끼는 원정팀 팬들이다. 상무는 군 복무 중인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다. 선수들은 전역하면 흩어진다. 팬이 지속적인 충성심을 갖기 어려운 구조다. 그런데도 그들은 큰북을 들고 원정 경기장까지 왔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1942)에서 이렇게 썼다. "시지프는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신들의 형벌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올리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시지프. 그럼에도 카뮈는 그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결과가 아니라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3-1. 결과와 무관한 응원
원정팬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수천 명의 홈팬 앞에서 소수로 응원하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그럼에도 큰북을 쳤다. 그리고 이겼다. 그러나 설령 졌더라도 그들은 쳤을 것이다. 카뮈라면 그 행위 자체가 이미 의미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응원은 승패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응원한다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다.
결론
경기가 끝나고 아이들은 또 오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마 다시 올 것 같다. 홈팀의 팬이 됐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홈팀의 골을 바랐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연고지 팀을 응원한다는 것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태어난 곳, 살고 있는 곳, 그리고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본 사람들과 만들어가는 상상의 연대다. 오늘 원정팬들이 보여준 것은 그 연대가 반드시 다수일 필요도, 이길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큰북 소리는 결과와 무관하게 울렸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경기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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